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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동맹과 전범이 헷갈리는 세상

금싸라기 땅에 거대한 흉물이,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그렇다고 철거도 안 된다. LA에서 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터스틴 레거시(옛 해병대 항공기지)'에 실재한다. 높이가 17층 빌딩과 맞먹어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온다. 한인 밀집 거주지역이기도 해서 대체 저게 뭔가 궁금해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흉물'은 격납고.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 때 비행정을 보관했던 곳이다. 일본군의 잠수함 공격을 탐지하기 위해 여기서 비행정을 띄웠다. 연방정부 '모뉴먼트'로 지정돼 있어 허물기는커녕 옮길 수도 없다. 확 밀어버리면 경제적 효과가 수십억 달러는 족히 될 텐데. 요즘 이 단지에 새로 짓는 하우스는 아무리 작아도 밀리언 달러가 넘는다. 개발에 걸림돌이어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을 수밖에. 볼품없는 이 건물이 어떻게 국가의 기념물이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무로 지어서다. 격납고를 만드는 데 쓰인 목재는 오리건이 원산지인 미송(더글러스 퍼). 무려 270만 개나 되는 송판을 엮어 격납고 한 채를 지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겠다. 철근 콘크리트로 짓지 왜 나무로? 전쟁 중이어서 쇠란 쇠는 몽땅 '민주주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란 데로 보내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 유명해진 곳이다. 결국 엔지니어들이 머리를 맞대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목재 격납고. 유례가 없을뿐더러 당시 미국 첨단공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해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스널' 곧 '병기창'은 어디를 말하는 걸까. 디트로이트를 비롯해 피츠버그, 펜실베이니아 등 한때 세계 제조업의 메카로 불렸던 곳이다. 자동차 조립라인에선 탱크와 비행기가 쏟아져 나오고, 조선소에선 각종 전함과 항공모함이 줄을 잇고. 미국이 이처럼 단기간에 전쟁물자를 대량생산해 낼 수 있었던 건 US스틸 공이 컸다. 쇠붙이는 모두 이 제철소의 용광로에서 강철이 돼 나왔기 때문일 터. '병기창' 덕분에 독일과 일본의 야욕을 꺾어놨으니. 일찍이 '철은 자유의 수호자'란 명언을 남긴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90년대 이후 '아스널'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제조업이 무너지는 바람에 공장은 문을 닫아 기계는 녹이 슬고. 이른바 '러스트 벨트'가 된 것. 산업의 기반인 철강도 경쟁력을 잃어 그 많던 일자리가 대부분 없어졌다. 트럼프가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수입산 강철에 관세 폭탄을 예고, 파장이 커지고 있다. '러스트 벨트'를 '병기창'으로 만들어 옛 영광을 되찾아주겠다는 거나 다름없어 이 지역 노동자, 특히 백인들이 열광하는 분위기다. 한국이 자칫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 제한조치)를 발동한 데 이어 이젠 철강까지. 가상 적국인 중국은 그렇다 치자. 하필이면 왜 동맹을 콕 찍어 손을 보겠다는 건지. '전범국' 일본은 명단에서 쏙 뺀 채. 터스틴 해병대 기지는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폐쇄됐으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자 다시 오픈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격납고엔 비행정 대신 헬리콥터가 들어서고. 그래서인지 기지 인근엔 '인천 웨이'를 비롯해 한국과 관련된 거리 이름이 적지 않았다. 이젠 개발 열기에 함몰돼 거의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남은 길은 '빅토리 로드' 뿐이다. 요즘 한미관계가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좀 찜찜하다. 동맹을 넘어 한때는 혈맹이라고까지 불렀지 않은가. 함께 '빅토리' 곧 승리하는 길이 분명 있을 텐데. 운전 중 격납고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소회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2-28

[윌셔 플레이스] 가족이민이 'CIMT' 부도덕한 범죄?

육이오 바로 이틀 후 유엔 안보리가 한반도 파병을 결정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다. 누구나 아는대로 소련대표가 불참한 탓이다. 그런데 하마터면 이 결정이 며칠 뒤 뒤집힐 뻔했다. 거부권을 갖고 있는 소련은 자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아 이 결의문이 무효라는 주장을 폈다. 서방 대표들은 소련 측의 논리에 밀리는 듯싶었다. 절체절명의 그 순간, 미국 대표가 입을 열었다.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러 놓고도 이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짓입니다."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어 미국 대표는 소련 측의 요구가 왜 부당한지를 조목조목 따졌다. 이미 안보리 소집을 통보했는데도 불참한 것은 유엔헌장에 명시된 의무를 저버린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유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행위라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소련 대표는 시쳇말로 벙찔 수밖에. 유엔의 참전은 명분이 분명해져 참전국의 숫자가 더욱 늘어나게 됐다. 소련 입장에선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 됐다고 할까. 소련이 저질렀다는 '부도덕한 행위'는 영어로 '터피튜드(turpitude)'다. 원래는 외교용어가 아니라 이민법 시행과 관련해 미국서 오래 전부터 쓰여왔던 단어다.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이민관련 업무를 하는 분들에게는 아주 익숙하다. 이른바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된 범죄(CIMT)'에 걸리면 영주권은 물론 시민권 신청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성범죄나 사기, 횡령, 절도, 마약밀매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0여 년 전 쯤인가. 시애틀에 사는 한인이 시민권 신청을 거부당해 주류사회서도 파문이 일었다. 이민국이 들이댄 잣대가 바로 CIMT다. 굴 채취 규정을 어긴 혐의로 벌금 150달러를 부과받은 게 '부도덕한 행위'로 찍혔다. 그 한인은 미국온 지 얼마 안된 신참 이민자. 그런 규정이 있는지도 몰랐다. 우선 겁부터 나 티켓을 받자 즉시 벌금을 냈다. 그새 알래스카 항공사에 취업해 세금도 또박또박 내고, 지역사회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주류언론사들이 먼저 흥분했다. 그 한인보다 더 도덕적인 미국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며. 결국 이민국은 한인에 정중히 사과하고는 시민권을 내줬다. 요즘 트럼프 행정부가 가족이민의 축소를 골자로 하는 이민개혁안을 내놔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드리머'(부모를 따라 미국에 들어와 불법체류 신분이 된 청소년)를 구제해주는 대신 시민권자의 형제자매나 부모 초청을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말이 축소지 아예 빗장을 걸어 잠그겠다는 거나 다름없다.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은 내게 오라/ 오갈 데가 없어 쓰러진 가엾은 사람들/ 머물 곳이 없어 사나운 비바람에 내몰린 이들이여/ 모두 내게 오라." 이민선을 타고 뉴욕에 온 트럼프 대통령 조상들도 자유의 여신상에 새겨진 이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았을텐데. 오늘날 이 나라가 최강국이 된 데는 이민자의 땀과 열정이 바탕이 됐을 터다. 클로이 김의 부모가 이민오지 않았던들 평창올림픽에서 미국의 영광이 어찌. 피겨 아이스댄싱 3위에 오른 마이아와 알렉스 시부타니 남매는 일본계다. 피겨 단체 동메달을 딴 미국팀에 아시아계는 4명이나 된다. 21일 현재 미국이 수확한 메달 12개 가운데 아시아계 차지는 최소 3개. 이래도 이민문호를 닫을 셈인가. 육이오 때 소련의 '터피튜드'를 질책하며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미국. 이젠 되레 이민을 옥죄는 이 나라가 부도덕하다는 욕을 먹게 생겼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2-21

[윌셔 플레이스] 프레지던트 vs 대통령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평화,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의 원년을 1984년으로 잡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로널드 레이건이 재선에 나선 해다. 그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레이건의 상대 민주당 후보는 월터 먼데일. 카터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내 지명도도 꽤 높았다. 처음엔 쉽게 봤는데 만만치 않았다. 먼데일은 당시 극을 향해 치닫던 냉전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며 선제공격을 폈다. 표심이 먼데일 쪽으로 흔들리는 듯싶었다. 때맞춰 레이건 캠프가 회심의 카드를 내놨다. '더 베어(The Bear)' 캠페인 광고다. 오프닝 멘트가 퍽 인상적이다. "숲속에 곰이 한 마리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쉽게 띄지만 다른 사람에겐 잘 보이지 않는군요." 곰은 캘리포니아의 상징인 그리즐리 베어. 나레이터의 묵직한 톤이 흐른다. "곰을 길들일 수 있다고 하는데 천만에요. 아주 위험한 동물이어서 미리 대처해야 합니다." 이어 한 남자가 등장하자 무서운 듯 뒷걸음질 치는 곰. 레이건의 사진이 화면을 꽉 채우며 자막이 나온다. "레이건, 평화를 위해 준비된 대통령." 곰이 소련을 의미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협상을 벌여 소련을 길들이겠다는 먼데일의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간접적으로 꼬집었다. 곰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숲속의 포식자. 자칫 잡아먹힐 수도 있는데 대화를 하겠다니. 광고의 키워드는 '힘을 통한 평화'다. 강하고 위대한 미국만이 평화를 담보해준다는 레이건의 설득에 먼데일의 유화론은 동력을 잃고 곧 잊혀졌다. 그해 대선 스코어는 49대 1. 레이건은 50개 주 가운데 먼데일의 고향인 미네소타만 뺏겼을 뿐 전대미문의 압승을 거뒀다. 레이건의 전략무기는 다름 아닌 그의 조크. 핵폭탄 몇백 개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파워를 지녔다. 언젠가 그는 소련의 반체제 인사 탄압 및 열악한 인권 상황과 관련해 이런 농을 던졌다. "미국인이 소련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백악관 앞에서 '레이건, 지옥에나 가라'고 외칠 수 있다고. 대통령이라도 맘에 안 들면 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그래도 아무도 안 잡아가. 소련인이 되받았다. 나 역시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앞에서 '레이건, 지옥에나 가라'고 외칠 수 있지. 당신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잡아가기는커녕 (비밀경찰들이) 손뼉을 쳐주데." 기자들은 웃음바다에 풍덩 빠져 한동안 허우적대야 했다. 같은 평화라도 옛 로마의 '팍스 로마나'와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는 그 결이 다르다. 전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의 추구다. 힘이 커지면 옆 나라부터 집어삼킬 궁리를 할 텐데 평화는 무슨. 점령당한 주변국들은 로마에 대항할 힘이 없으니 그저 입 닫고 가만있을 수밖에. '팍스 로마나'는 어쩌면 '강요된 평화'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반면 후자는 해방과 자유에 방점이 찍힌다. "고르바초프여, 당장 이 벽을 허물라." 레이건이 베를린 장벽 앞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외친 호통이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결정체다. 문득 레이건의 B급 영화배우 시절 얘기가 떠오른다. "자네 대통령 같은 거 해볼 생각 없나." 친구의 말에 레이건이 머리를 극적였다. "왜, 자네도 내 연기가 영 시원찮아? 자꾸 대통령이나 하라고 하게." 레이건의 장례식장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추모사 도중 인용해 화제가 됐던 유머다. 세계 최정상급 조문객들도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기억에 남는다. 이번 주말은 '프레지던츠 데이' 연휴다. 미국의 마흔 번 째 대통령인 레이건의 미소 띤 얼굴과 함께 촌철살인의 조크가 새삼 그리워진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2-14

[윌셔 플레이스] '수퍼보울 C' 미국은 수퍼파워일까

수퍼보울 개막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 10여 분 전, 조는 한 자리가 비어있는 걸 발견했다. 궁금한 나머지 그 옆 좌석의 남자에게 물었다. "이 자리 임자가 있나요?" 마지못한 듯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 겁니다." 조는 궁금증이 더해졌다. "근데 왜 혼자서?"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아내와 함께 오기로 했는데 그제 하늘나라로 갔어요." 헐, 조는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 친지들 가운데 한 분과 함께 왔어야지요." 남자가 혼자 온 이유를 댔다. "지금쯤 그들 모두 장례식장에 있을 거요."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하이데거와 하마, 천국의 문을 향해 걷다'는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제목부터 괴이하기 짝이 없다. 하이데거는 '실존철학의 지존'으로 불리는 20세기 최고 석학 중의 한 분. 그런데 하마는 또 뭐고. 저자는 토머스 캐스카트와 대니얼 클라인. 둘 다 이른바 개똥 철학자들이다. 삶의 궁극적인 명제인 죽음을 유머로 풀어내 독자들을 뜨악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천국행보다 풋볼이 더 중요하다는 건지. 아무튼 미국인들은 수퍼보울에 영혼이 저당 잡혀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우선 위풍당당 경기장에 들어서는 선수들에게서 로마제국 병사들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300파운드가 넘는 거구들이 헬멧을 눌러 쓴 채 입장하면 스타디움은 수만 관중의 함성으로 뒤덮이고. 세상에 투구를 쓰고 경기를 하는 팀 스포츠가 풋볼 말고 또 있는가. 수퍼보울 원년은 1967년. USC 대학풋볼팀의 홈구장인 LA 콜리시엄(로마식은 콜로세움)에서 처음 열렸다. 하필이면 왜 여기서? 옛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본 따 지어서다. 어느 팀인가는 기억에 없지만 그 구단주의 말을 인용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수해 관중을 수용할 수만 있다면 프로풋볼(NFL) 개막전을 이 곳에서 치르고 싶다." 콜로세움이 어떤 곳인가. 검투사들이 피 흘려가며 치열하게 싸웠던 곳 아닌가. 경기장 바닥에 왜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할 터다. 지상 최대의 엔터테인먼트가 열렸던 로마의 콜로세움. 그래서 수퍼보울의 하프타임 쇼는 올림픽 저리가라다. 선택받은 자만이 무대에 설 수 있으니까. 올림픽이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면 수퍼보울은 세계 최초의 패권국가 로마제국을 빼다 박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퍼보울은 로마 숫자로 표기하는 게 관례로 굳어져 있다. 기본숫자는 I(1) V(5) X(10) L(50) C(100) D(500) M(1000). 숫자의 왼쪽은 뺄셈, 오른쪽은 덧셈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IX(10-1)는 9가 되는 식이다. 아라비아 숫자를 쓰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데 왜 로마숫자를? 클래식하고 강인해 보여서다. 그래서인지 미 육군의 주력인 군단도 로마숫자로 표기한다. 토요일에 경기를 치르면 좋을 텐데 왜 굳이 일요일을 고집하는지. 기독교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래서 '수퍼 선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챔피언이 누가 될지는 그날 하나님만이 점지해 주신다고 해서다. 아마 신마저 궁금해 만사 제쳐놓고 하늘에서 수퍼보울을 구경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느님도 그런데 하물며. '하이데거와 하마~'에 등장하는 남자가 아내 장례식도 빼먹고 수퍼보울 구경 온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이번 주말 열리는 수퍼보울 LII(52회). 전국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는 날이다. '수퍼보울C'가 예정된 MMLXVI(2066)년에도 미국은 여전히 홀로 수퍼파워일까. 트럼프가 국정연설에서 밝힌 내용대로 이뤄진다면야.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1-31

[윌셔 플레이스] 만델라와 아이스하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테디) 루스벨트. 둘은 삶의 궤적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만델라가 거의 서른 해를 쇠창살에 갇혀 지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만델라가 '화해와 통합의 아이콘'이 된 데는 루스벨트의 영향이 컸다. 둘은 어떻게 1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떨쳐내고 '하나'가 됐을까. '만남'의 단초는 짐작컨대 스포츠. 사연은 이랬다. 집권 첫해, 만델라는 럭비 국가대표팀 '스프링복스'의 주장을 관저로 불렀다. 잔뜩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으나 말엔 비장함이 묻어났다. "대표팀에 흑인들을 넣어 주시오." 당시 스프링복스는 백인들의 전유물. 인종차별의 원흉으로 지목됐던 터다. 오죽했으면 국가대항전이 열려도 흑인들이 상대팀을 응원했겠는가. 자국팀에 야유를 보내며 지기를 바라는 국민들. 만델라는 이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프링복스를 흑백 혼합팀으로 만들라는 압력을 넣은 것. 대통령의 주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월드컵에서 꼭 우승해 주시오." 만델라는 이듬해(1995년) 남아공에서 열리는 럭비 월드컵을 인종화합의 대제전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그래서 어떡하든 이겨야 했다. 최약체로 분류돼 참가국마다 남아공을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판국에. 주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만델라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봉투 하나를 건넸다. 숙소로 돌아가 읽어 보라는 말과 함께. "이러쿵 저러쿵 훈수나 둘려는 사람이 중요할리 없지요. 정말 소중한 사람은 경기장에 있는 투사들입니다." 루스벨트가 퇴임 후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강연한 것으로 흔히 '경기장의 투사(Man in the Arena)'로 불리는 명연설이다. "(투사는) 부단한 열정으로 대의를 좇아 성심을 다해 몸 바쳐 싸웁니다. 잘 되면 승리의 결실을 맛볼 것이요, 설사 진다해도 대담하게 맞서다 쓰러질 것입니다." 비록 루스벨트를 인용했지만 만델라의 진심이 느껴졌다. 편지를 읽은 주장은 울컥했다. '흑백은 하나'라는 대의를 따른 덕분인지 남아공은 월드컵에서 연일 기적을 써내려 갔다. 영국과 호주에 이어 세계 최강 뉴질랜드마저 꺾고 우승 트로피를 안은 것. 이 감동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스크린으로 옮겼다. 영화 '인빅터스'가 탄생한 배경이다. 남아공의 럭비 월드컵 제패는 1980년 미국 남자 아이스하키팀의 동계올림픽 우승과 함께 스포츠 역사에서 최대 이변으로 꼽힌다. 그해 유력한 금메달 후보는 '북극곰' 소련. 미국은 대학선수 위주로 대표팀을 꾸렸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길 수는 없는 일. 그런데도 강호들을 잇달아 격파하고는 드디어 소련과 맞붙었다. 연장 혈투 끝에 이긴 쪽은 미국. 당초 메달권에 들지도 않았는데. 알고 보니 미국팀이 투혼을 불사르게 된 동력은 '경기장의 투사'였다. 선수들마다 빙판에서 '대담하게 맞서다 쓰러지겠다'며 다짐, 또 다짐한 결과물이었던 것. 냉전이 한창일 무렵이어서 미국의 우승은 파장이 컸다. 얼마 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스스로 무너지는 운명을 맞지 않았는가. 평창 동계올림픽의 관심이 온통 남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쏠려있다. 캐나다 출신의 대표팀 감독이 작금의 상황을 한마디로 콕 찍어 정리해줬다. "우리는 맹수인가, 먹잇감인가." 문장은 다르지만 내용은 '경기장의 투사'나 진배없다. 단일팀이 맹수가 돼 돌풍을 일으키면 효과가 극대화될 텐데. 한낱 먹잇감으로 전락하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어디 전쟁 뿐이랴. 스포츠에서도 '승리 외엔 대안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일찌기 만델라가 간파한 경구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1-24

[윌셔 플레이스] '오만과 편견'의 시대

오래전 LA 인근 스키장에서 겪었던 얘기 한 토막. 리프트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 표 파는 여직원이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인 부부의 중학생 아들에 물었다. "영어를 말할 줄 아느냐." 영어가 모국어인 출생시민에 이 무슨 망언을. 스키시즌만 되면 그 아들이 황당해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직원은 영어가 서툰 손님들과 씨름하다 보니 왕짜증이 났을 것. '동양계=영어미숙자'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이 같은 말이 튀어나왔던 모양이다. 영어와 관련해선 LA 폭동 때 ABC 방송의 '나이트라인' 앵커 테드 카플과도 에피소드가 있다. 안젤라 오 변호사가 한인사회 대변인격으로 이 심야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우리 입장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앵커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당신처럼 영어 잘하는 한인을 본 적이 없다." 내 얼굴이 다 화끈할 정도로 모멸감을 느꼈는데 당사자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영어가 모국어인 출생시민에게 이 무슨 망언을. 카플의 경우는 편견이 아니다. 대담과정에서 오 변호사의 영어가 본토 발음이라는 사실을 알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영어를 잘 한다니. 어쩌면 오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아무리 토박이라 한들 동양계 아닌가. 얼굴이 다르고, 피부색깔이 다르고. 우월감이 바탕에 깔려 있어 이 같은 말을 했지 싶다. 그런데 어쩌랴. 카플이 은퇴한 뒤 한국여성(장현주)이 그 자리를 꿰찼으니. 오만은 건방진 행동이고, 반면 편견은 특정 집단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친 의견이나 태도를 뜻한다. 오만과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이처럼 확연히 다르지만 인종과 관련해선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편견을 가지다 보니 오만해지고, 오만한 감정을 품다 보면 편견이 생길 수밖에. 우리에겐 그 말이 그 말이다. 대체 생김새가 뭐길래. '루키즘(lookism)'이란 조어가 있는 걸 보면 일단 얼굴은 잘생기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외모 지상주의'다. 루키즘은 남녀관계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0년 존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 선거. 누구나 현직 부통령인 닉슨의 당선을 점쳤는데 어떻게 케네디가 이겼을까. 루키즘이 여성들을 '심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젊지, 핸섬하지, 섹시하지. 끊임없이 막말을 지어내 논란을 빚고 있는 트럼프가 이번엔 루키즘으로까지 영역을 넓혀 빈축을 사고 있다. 한인 여성과 관련해서다. 백악관에서 이 여성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나선 갑자기 외모를 거론했다. "왜 예쁜 한국여성이 우리 정부를 대신해 북한과 협상하지 않는가." 이 한인의 업무능력엔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생김새만 갖고 말을 이어갔다. 칭찬이 아니라 깎아내렸다고 해야 옳겠다. 그뿐인가. 어디 출신이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이 여성은 뉴욕이라고 답했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트럼프가 재차 묻자 맨해튼이라고 말해줬다. 고위직인 이 여성이 처음부터 대통령의 질문 요지를 몰랐을 리 없었을 터. 트럼프로 하여금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묻게 한 걸 보면 이 여성의 심기가 꽤 불편한 듯했다. 결국 마지 못해 부모가 한국서 왔다고 털어놨다. 이 여성 역시 영어가 모국어인 출생 시민이다. 그런데도 자꾸 '어디서 왔냐'고 묻는 대통령. 트럼프가 오만한 건지, 아니면 편견을 가진 인물인지. 제인 오스틴의 고전 '오만과 편견'에 이런 말이 나온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오늘의 미국에 던져주는 경고처럼 들린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1-18

[윌셔 플레이스] 평창으로 가는 길

"길만 좀 닦아놨어도." 아프리카, 그것도 '오지 중의 오지'라는 차드 공화국을 간다는데 솔직히 놀랐다. 아무리 목사님이라도 벌써 팔순을 넘겼는데. 정작 본인은 태연하다. 단지 공항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도로사정이 열악한 것만 빼곤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저기 움푹 팬 길을 반나절 넘게 달리다 보면 심장마저 덜컹거릴 텐데도. 목사님은 2월 말쯤 소망소사이어티의 봉사자들과 함께 차드를 간다. 원주민들에게 생명수나 다름없는 우물을 파주기 위해서다. 차드는 원래 프랑스 식민지다. 목사님에 따르면 공장은커녕 길 하나 제대로 만들어주지 않아 21세기인데도 마치 원시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곳이다. 서구 열강들이 어떻게 착취와 수탈을 했는지 실감을 한다며 혀를 찼다. 길이 역사의 도마 위에 처음 오른 것은 90년대 말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이슬람 주민들을 인종청소 하는 참상이 불거졌을 때다. 미국의 네트워크 TV 방송들이 정교회 민병대원들의 만행을 카메라로 잡아 전 세계에 생중계하듯 고발하지 않았는가.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에서도 수십만 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현장을 취재한 미국 방송국은 거의 없었다. 인종차별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시 NBC 보도담당 제작자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코소보엔 길이 있는데 아프리카엔 없어요. 중계차량이 진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요." 유럽엔 옛 로마제국이 닦아놓은 도로가 여전히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얼마나 단단하고, 잘 만들었길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는 옛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닐지 싶다. 정보와 물자가 이 길을 통해 로마에 집중됐고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된 것도 로마의 길이 큰 힘이 됐다. 일찍이 전대미문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그 나라에 이런 격언이 전해진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성을 짓는다는 것은 폐쇄와 불통, 반면 길을 닦아내는 것은 개방과 소통이다. 인구 고작 100만~200만 명의 유목민들이 중국과 이슬람, 유럽을 150년이나 통치했으니 길이 갖는 정치 문화적 함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 미국의 국보 1호를 꼽으라면 단연 고속도로다. 있을지도 모를 소련의 핵 공격에 대비해 전국에 고속도로를 그물망처럼 깔아놨다. 경보가 울리면 즉각 대피할 수 있게. 그래서 프리웨이 표지판이 방패(shield) 모양으로 생겼다. 옛 로마 군단의 아이콘, 바로 그 '쉴드'다. 16년 넘게 걸린다는 길을 2년 반 만에 뚝딱 해치운 나라. 개발독재 시절, 기념비적인 프로젝트로 꼽히는 경부고속도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길을 터 풍요한 사회가 눈 앞에 펼쳐질 것이라며 체제 선전에 열을 올렸는데 정말 그대로 이뤄졌다. 요즘은 평창으로 향하는 길이 단연 화제다. 북한이 겨울올림픽에 역대급 규모의 방문단을 파견한다고 해서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육로로 내려오는 게 유력하게 검토된다. 북쪽에 그 길이 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남북관계의 답은 길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측 대표도 '왕래의 길'을 열어 놓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핵에 돈과 인력을 쏟아부은 탓에 길이 차드보다 더 열악할 것만 같다. 같은 최빈국이라도 차드가 북한보단 오히려 선진국이다. 1인당 소득이 차드(2600달러)가 두 배나 높다. 이제 남북관계의 모든 길은 평창으로 통하게 돼 있다. 길을 내야 나라가 흥하지, DMZ에 성곽을 쌓아 올리면 망하는 지름길이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1-10

[윌셔 플레이스] 긍정의 에너지

 언뜻 투박해 보이지만 실은 공들여 빚어낸 질그릇. 듣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소울 뮤지션. 이 여인에 꽂힌 이가 버락 오바마다. 그에 따르면 위로가 되며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깨달음을 주기도 하고 가르침까지 준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인디아 아리가 그런 가수다. 오바마는 알려진 대로 자신의 대선 캠페인을 변화로 꽉 채웠다. 전국적인 지명도가 낮은데도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 자리를 꿰차고 이어 백악관까지 차지하게 된 데는 인디아 아리의 공이 작아 보이지 않는다. 변화, 변화, 변화. 오바마의 유세현장엔 인디아 아리의 대표곡 '희망이 있네요(There's Hope)'가 울림이 돼 퍼졌다. 변화와 희망이 함께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인파가 넘쳐났다. "가진 게 적었던 때는 난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뭐 이래, 백만 달러가 있어도 행복하지 않지 뭐야/ 그제야 깨달았지/ 자동차가 크고 멋지다고 다가 아니야/ 네 마음속 믿음의 크기가 중요하지." 중저음의 넓고 깊으면서 쫄깃한 리듬이 이어진다. 노래의 하이라이트인 코러스 대목이다. "희망이 있네요/ 미소 짓는 데 돈이 드나/ 웃는 데 돈을 내야 하나/ 주님께 감사해요/ 희망이 있네요." "TV를 켤 때마다 (희망이 있네요)/ 누군가 미친 짓을 하는데도 (희망이 있네요)/ 개스값이 오르는데도 (희망이 있네요)/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희망이 있네요)/ 진실되게 살아가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왜냐구? 희망이 있기 때문이죠." 변화를 화두로 내걸고 담대한 개혁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오바마. 재임 초기 지지율 60%가 퇴임 직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정권말기에 나타나는 권력의 누수현상 곧 레임덕을 겪지 않아 새로운 역사를 썼다. 노랫말처럼 희망을 심어줬기 때문일 터. 인디아 아리는 '긍정의 음악' 이른바 '파지 뮤직(posi music)'의 마술사다. 그래서인지 가사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난 비디오에 나오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수퍼모델처럼 잘 빠지지도 않았구/ 그래도 난 날 무조건 사랑할 줄 알아/ 난 여왕이거든."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이 생각하기에 인생이 달라진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인디아 아리가 나오기 전에는 누가 있었을까. '대중음악의 불멸' 빙 크로스비. 그가 부른 '긍정을 강조하세요(Accentuate the Positive)'는 '파지 음악'의 원조로 꼽힌다. "긍정적인 것만 강조하세요/ 부정적인 건 없애버리고/ 어설프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과는 섞여 지내지 마시고." 그러면서 왜 긍정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성경에 빗댔다. "고래 뱃속의 요나, 방주의 노아/ 그들은 뭘 했을까요/ 모든 것이 깜깜하게 보였을 텐데/ 이봐요, 그들은 긍정적인 것만 강조해야 한다고 했어요/ 부정적인 생각일랑 아예 접어두고." 노래가 나온 때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다. 전쟁의 참화, 파괴, 상실감과 자괴감 등 네거티브가 일상을 지배했을 때다. 그런데도 희망을 노래했다. 삶은 어쨌거나 살아야 하니까. '파지 음악'이 팝의 한 장르로 태어난 배경이다. 대체 긍정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디아 아리의 말대로 웃음이 아닐지 싶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우리말도 있지 않은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온갖 핍박을 받았던 한민족이 생존을 이어온 원동력도 알고 보면 웃음이다. 새해엔 억지로라도 하루 한 번 이상은 크게 '하하하' 웃어보자. 웃음과 긍정으로 가득한 세상. 삶에 활기가 펄펄 묻어날 게다. 웃는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닐진대. 박용필 / 논설고문

2018-01-03

[윌셔 플레이스] 트럼프가 내게 준 새해 선물

12월 한 달 내내 정치권은 물론 온 미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말을 꼽으라면? '미 투(me too)' 곧 '나도 당했다'는 할리우드의 성폭력 스캔들을 떠올리겠지만 천만에. '미 투'는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짐승을 굶겨라(starve the beast)'로 요약되지 않을지 싶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세금 감면 정책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세금을 깎아준다는데 개인이건, 기업이건 이 말만큼 피부에 와 닿는 것도 없지 않은가. '짐승'은 정부를 일컫는다. 그냥 내버려 두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습성이 있어서다.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려면 방법은 딱 하나. 세금을 적게 거두면 된다. 쓸 예산이 쥐꼬리만큼인데 정부가 발버둥 쳐봤자다. '짐승'의 원조는 로널드 레이건. 오죽했으면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믿지 말라. 정부 자체가 바로 문제"라고 경고하지 않았는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인데도 쓴소리를 쏟아냈다. 우선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전자는 작은 정부, 후자는 큰 정부를 지향한다. 보수냐, 진보냐는 그다음에 따져볼 문제이고. 레이건의 당적은 공화당이다. 그의 통치철학 역시 작은 정부에 방점이 찍힌다. 이쯤 되면 레이건이 왜 정부를 '짐승'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가겠다. 방치하면 몸집이 불어나 큰 정부가 되기 십상. 내 돈도 아닌데 일단 쓰고 보자는 행태가 공무원사회에 번지게 된다. 세금이 줄줄이 새는 건 불 보듯 뻔할 테고. 그래서 레이건의 국정운영 지침은 '짐승을 굶겨라'다. 레이건은 파격적인 세금감면 조처를 취했다. 집권당에서조차 난리가 났다. 나라 살림살이에 차질을 빚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레이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화술의 달인' 답게 반대자들을 구슬려 가며. 세금을 내리면 기업 투자가 늘어나고, 그러면 새 일자리가 생겨나고. 개인도 마찬가지다. 여윳돈이 생겨 소비가 늘어나고, 그러면 경기가 되살아나고. 레이건은 궁극적으로는 세수입이 오히려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짐승'을 쫄쫄이 굶긴 결과는? 레이건이 퇴임할 무렵 미국은 사상 처음으로 세수입 1조 달러 시대를 맞는다. 그의 예측대로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짐승'을 굶긴 덕분에 미국은 최고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최강자로 우뚝 서 지구촌에 평화를 안겨줬지 않은가. 레이건 재임 시절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 같다. 트럼프의 이번 대규모 세제개편은 레이건 이후 무려 30년 만이다. 내용 또한 그때와 거의 닮은꼴이다. 웰페어나 메디케이드 등의 예산을 크게 줄이는 대신 기업과 개인의 세금부담을 크게 낮춰 제2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하겠다는 야심 찬 구상이다. 트럼프는 본디 정치인이 아닌 장사꾼 출신이어서 비즈니스 셈법은 어느 누구보다 빠삭할 터. 내 삶도 뭔가 크게 달라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새해가 기다려진다. 세금 적게 내고 경기도 좋아진다는데. 트럼프를 믿어 보자. 또 하나. 이참에 내 안의 '괴물'도 굶기면 어떨지. 탐욕, 분노, 증오, 폭력, 마약, 음주, 거짓…. 괴물은 언제나 달콤하게 다가와 공기처럼 전염되고 퍼지기 마련이다. '몬스터'가 지배하는 사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을까. '괴물을 굶겨라(starve the monster)'를 새해결심으로 정해보자. '짐승'을 굶기면 주머니가 넉넉해지고, '몬스터'를 굶기면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다는데.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2-27

[윌셔 플레이스] 스쿠르지의 '바 험버그'

"선생님, 기본적인 생활도 힘겨운 이들이 수만 명에 이릅니다." 자선단체 직원들이 찾아와 기부를 요청하지만 노인은 모진말로 거절한다. "구호소로 보내면 되겠네." 그래도 이 영감의 마음을 돌리려 애를 쓴다. "그곳에 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가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쏘아 붙인다. "죽는 게 낫겠다면 그렇게들 하라고 하세요. 남아도는 인구도 줄이고 좋구먼." 그는 누구일까. 매년 이맘 때 쯤이면 누구나 한 번 쯤 떠올리게 되는 소설 속의 캐릭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쿠르지다. 출판된 지 170년이 넘었는데도 인종과 국적, 종교를 떠나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명작이다. 이유가 대체 뭐길래. 소설이 스쿠르지의 '본 어게인'을 담아냈다고만 알고 있으면 너무 단순한 이해일 터. 작가는 당시 가진 자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스쿠르지의 입을 빌려 통렬하게 꾸짖었다. 사회적 신분에 걸맞는 도덕적 책무, 곧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외면하는 자들에 한 방을 날렸으니 그 통쾌함이란. 배경은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 최전성기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번영을 누렸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비참했다. 스쿠르지로 대표되는 부자들은 분배와 복지가 나라를 망친다며 반발하고. 오죽했으면 디킨스가 스쿠르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싶다. 책이 나온 때는 1843년. 세계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세상에~. 그 무렵 '아편전쟁'이 터졌지 않은가. 당시 영국의 부자들은 청나라에서 수입한 차의 우아한 향과 신비스런 맛에 푹 빠졌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중국과의 결제수단은 원래 은이었는데 이 귀한 금속을 주기 아까웠다. 여기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아편. 인도에서 재배한 것을 중국에 몰래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 돈으로 차를 수입한 것이다. 은을 아편으로 바꿔치기 했다고 해야할지. 이 바람에 수백만 명이 중독돼 대륙은 황폐화의 길을 걷게 된다. 급기야 청이 아편금지령을 내려 전쟁이 터졌는데. 결과는 뻔했다. 청군 20만 명이 1만 명도 채 안 되는 영국군에 박살이 났다. 아편수출에 걸림돌이 없어지고 전리품으로 홍콩까지 손에 넣고. 영국은 이처럼 인류 역사 상 유례없는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켰다. '신사의 나라'라면서. 이후 서구열강들이 중국을 이리 뺏고 저리 찢어 대륙은 거덜나고 말았다. 얼마나 치욕적이었으면 시진핑의 '중국몽(차이나 드림)' 캐치프레이즈가 '아편전쟁을 잊지 말자'가 됐을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돈이 된다면 마약이건 뭐건 가리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 스쿠르지와 같은 인간들이 어디 하나 둘이었겠는가. 윤리도덕이 실종된 사회인데 종교라고 성할리 없겠다. 조카가 성탄절 이브에 인사를 건넨다. "삼촌, 메리 크리스마스!" 스쿠르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내뱉는다. "바 험버그(Ba Humbug)." 꼭 주술사가 외우는 주문처럼 들린다. '흥, 무슨 허튼소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12월이 가까워오면 '크리스마스가 싫다'는 의미로도 흔히 쓰인다. 뉴욕 증시가 연일 최고점을 찍으며 경제도 근래 보기 드문 호황세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엊그제 같은데. 디킨스가 살았던 시대가 요즘 같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본다. 유령들과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한 스쿠르지. 소설 끝자락에 이 자린고비는 가난한 아이들에 푸짐한 밥상을 차려준다. 그의 입에선 '바 험버그' 대신 '메리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오고. '돈=우상'의 등식이 깨지는 순간이다. 박용필 / 논설 고문

2017-12-20

[윌셔 플레이스] '쓰죽회' 가입하기

어느 5070 모임에서 좀 짠한 얘기를 들었다. 은퇴를 앞두고 집과 비즈니스를 정리해 적지 않은 돈을 아들에게 물려준 A씨 스토리다. 그의 노후 목표는 웰페어 수령. 일찌감치 시니어 아파트를 신청해 당첨되는 행운까지 잡았다. 그런데 마가 낄 줄이야. 아들 부부가 불화 끝에 갈라서고 말았다. 이민 와 고생 고생하며 번 돈이 위자료로 몽땅 며느리에게 넘어간 것. A씨는 허탈해졌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원래 자신의 소유란 걸 밝힐 수도 없고. 소송을 제기 해봤자다. 되레 웰페어 사기로 쇠고랑을 찰 게 뻔해 그저 냉가슴 앓는 꼴이 됐으니. 안 됐다는 생각도 들지만 또 한편으론 자업자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A씨가 유산을 남기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면 남은 삶을 훨씬 풍요롭고, 품위 있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그의 처지가 짠해지는 것이다. 그가 진작에 '다이 브로크(die broke)'의 삶을 실천에 옮겼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다이 브로크'는 빈털터리로 죽음을 맞는다는 의미. 쉽게 말해 '쓰고 죽자'가 원뜻에 가깝겠다. 20년 전 유명 재무설계사가 동명의 책을 써내 화두가 됐던 말이다. 책은 뉴욕타임스 '이 주의 베스트셀러'에 18주나 올라있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저자는 스티븐 폴란. 부동산 개발과 벤처캐피털로 큰돈을 벌고 명성을 얻은 그는 어느 날 폐암 판정을 받는다. 번 돈을 써보지도 못한 채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젠장, 뭐 이런 인생이 다 있어. 그런데 뜻밖에 반전이 일어난다. 세컨드 오피니언(두 번째 의사 소견)을 받은 결과 오진으로 드러난 것. 폴란은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돈 모으기와 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뒤집은 것. 모은 돈을 후회 없이 쓰고 떠나라는 주문이다. '다이 브로크'가 생겨난 배경이다. 사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수래공수거'란 말이 낯설지 않다.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고 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까. 하지만 '다이 브로크'는 표현이 긍정적이다. 인생은 '공수거'. 그래서 다 쓰고 가라는 거 아닌가. 폴란이 최초 진단대로 죽음의 병상에 누워있었다면 너무 원통해 눈을 편히 감지 못했을 것 같다. 어쩌면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수퍼리치'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 터. 이미 '다이 브로크'를 선언한 탓이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순간 재산은 거의 모두 비영리 자선재단에 넘어간다. '다이 브로크'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지.실제로 미국인의 절반 가량(46%)은 '공수거'로 삶을 마감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그래서인지 '쓰고 죽자'는 취지에 동감한 베이비붐 세대들이 '쓰죽회'를 결성해 모임을 갖는 경우가 주변에 적지 않다. 돈과 재능 등 평생 일궈온 자산을 죽기 전에 쓰고 나누면서 살자는 데 의기투합한 사람들이다. 동창회를 비롯해 각종 송년 모임이 줄을 잇는 요즘. 지갑 열기에, 놀기에, 그리고 쓰기에 딱이다. 100세 장수시대엔 친구와 가족 등 다양한 무형의 자산은 필수다. 자린고비나 스크루지 딱지가 붙는다면 어느 누가 내게 곁을 주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선배와 후배에, 친지에 밥 사주기 결심을 해보자. 복이 넝쿨째 들어오고 건강이 더욱 좋아질 테니까. 더구나 베이비붐 세대들이 쓰지 않고 움켜쥐고 있는 한 타운의 경기는 살아나기 힘들다.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것일진대 제대로 써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산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2-06

[윌셔 플레이스] 'OK 목장'과 한반도

서부영화는 총잡이들의 그저 그런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만들었다 하면 돈방석에 앉는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기본구조여서 그렇지 않나 생각이 든다. 특히 역사적 실체를 바탕으로 했다면 흥행은 그야말로 대박이다. 'OK 목장의 결투'가 그렇다. 시대적 배경은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0년대. 무대는 애리조나주 툼스톤(Tombstone)이다. 마을 이름이 묘지의 '비석'이 된 것만 봐도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주민이라고 해봤자 고작 100여 명. 한적한 시골이 은광이 발견되는 바람에 갑자기 붐타운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온갖 부류의 인간들이 몰려들어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영화는 '악의 무리' 카우보이와 '정의의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 삼 형제 간의 결투를 그렸다. 그러나 영화는 한낱 픽션일 뿐. 당시 상황을 정확히 짚어보자. 카우보이 쪽은 남군에 동정적인 민주당 성향이고 보안관 삼형제는 북군 출신의 공화당원들이다. 선과 악으로 편을 가를 수도 있겠지만 정치적 이념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도 같다. 제작자는 그러나 돈을 벌어야겠기에 카우보이를 악의 집단으로 매도해 버린 것은 아닐까. 어프 형제는 영웅으로 과대 포장되고. 그런데 'OK 목장'의 진정한 영웅은 따로 있었다. '와일드 웨스트'의 난세에 짜잔~ 하고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지 굿펠로(1855~1910)다. 미국 최초의 '트라우마 서전(trauma surgeon)' 곧 중증외상 전문의다. 한국 아주대병원의 이국종 교수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굿펠로는 부상을 입은 '목장'의 총잡이들을 가리지 않고 치료해줬다. 하루가 멀다고 총싸움이 벌어진 툼스톤에서 그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의사의 본분에 충실했기 때문은 아닐지 싶다. 굿펠로는 어떻게 서부의 변방 툼스톤에 자리를 잡게 됐을까. 의대 전과정을 올 A로 끝낸 그는 본인 말처럼 역마살이 끼었던 모양이다. 흘러 흘러 툼스톤까지 오게 되고.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칼솜씨(수술)를 한껏 뽐냈다. 환자를 당구대 위에 올려놓고는 배를 갈라 총알을 빼냈다. 보조 의사, 간호사가 있을 리 만무. 동네 이발사와 미장원 아줌마가 곁에서 수발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살려낸 게 78명, 실패한 경우는 단 두 건에 지나지 않았다. 툼스톤 체류 5년 동안, 그것도 최악의 환경에서 일궈낸 경악할 만한 성과 아닌가. 그의 병원은 연일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가난하건, 범죄를 저질렀건,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었건, 그에겐 오직 환자였던 것. 사회적 파장 따위는 마음에 담지도 않았다. 이 점에선 이국종 교수도 굿펠로와 거의 닮은꼴이다. 북한군 병사의 기생충 감염과 관련, '인권테러'를 가했다는 어느 의원의 비판에 "환자의 인권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목숨을 살리는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자유를 위해 죽음의 달음박질을 한 북한군 병사. 그는 이국종 교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됐다. 문득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자유야말로 인간의 가장 존엄한 가치다. 독재는 우파건, 좌파건 죄악일 뿐이다." 훗날 그는 분단 독일의 베를린 장벽 앞에 섰다. "당장 이 벽을 허물라." 어찌 보면 한반도 역시 'OK 목장'이나 다름없을 터. 선과 악이 혼재해있고, 독재와 자유의 정치적 이념으로 갈라져 있어서다. 주변에 영향을 주지 않고 '환부'만 싹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은 없을까. 레이건 같은 '명의'가 나와야 사태가 해결될 텐데.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1-29

[윌셔 플레이스] '턴! 턴! 턴!'의 인생

피트 시거(1919~2014)는 한국의 진보 좌익 사이에서도 '레전드'로 통한다. 1970~80년대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는 '애국가'처럼 불리지 않았던가. 반전 운동가이자 저항적 포크의 거장으로 기성체제에 대한 저항심을 일깨워줬다는 시거. 한국전 즈음 '매카시 광풍'이 불 때는 공산주의자로 찍혀 방송출연금지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특히 투기금융자본을 비판하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점령' 집회에 지팡이를 짚고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죽음의 병상에서도 불의와 타협 않는 꼿꼿함을 보여줘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에겐 또 하나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외국가수로는 처음으로 아리랑을 소개한 인연이 있어서다. 그것도 1950년, 세상이 코리아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 노랫말의 후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다. "내 고향 삼천리 금수강산에/ 언젠가는 평화와 풍요가 꽃피우리." 400여 년 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대역죄인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불렀던 노래라는 설명을 달았다. 죄를 지었을망정 자신이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조선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그래서 이승을 떠나기가 너무 힘들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시거는 아리랑이 일제 강점과 분단의 아픔이 서린 포크송이라며 직접 영어로 번역해 불렀다. 미국가수가 불렀는데도 애잔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아마 '한'을 가슴 한 켠에 담아내 그렇지 않나 싶다. 시거가 남긴 많은 작품 가운데 '불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노래가 있다. '턴 턴 턴(Turn! Turn! Turn!)'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합니다/ 계절이 바뀌듯이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변하지요/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둬들일 때가 있다지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금세 성경구절을 떠올릴 것 같다. 구약의 전도서 아닌가. '헛되고 헛되다'로 시작하는 전도서는 지혜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셰익스피어는 물론 링컨과 같은 위인들도 종종 인용해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는 그가 살아보니 세상만사 헛되다는 걸 깨달았다는 게 줄거리다. 이어지는 가사는 이렇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도 있지요." 여기까지는 전도서 구절을 그대로 베꼈다. 시거는 그런다음 이런 말을 덧붙였다. "평화는 언제라도 늦지 않지요." 그는 작곡은 본인이 했지만 가사는 바이블이 출처라고 솔직히 털어놨다. 자기가 손을 댄 건 '턴 턴 턴'과 마지막 평화와 관련된 구절 뿐이라는 것. 노래가 '평화'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걸 알 수 있겠다. 아리랑을 노래한 가수답게 오늘의 한반도 사태의 해결책을 이미 반세기 전에 제시했다고 해야할지. 전도서엔 솔로몬이 또 다시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 봤다는 내용이 나온다. "발이 빠르다고 달음박질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힘에 세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슬기롭다고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누구든 때가 되어 불행이 덮쳐오면 당하고 만다는 것. 달리기 선수라고, 힘이 장사라고, 돈이 많다고, 또 명문대학을 나왔다고 오만을 떨지말고 하찮은 작은 것일지라도 감사하며 살라는 뜻이 아닐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진대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고. 생스기빙데이를 맞아 느끼는 소회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1-22

[윌셔 플레이스] '헬로'가 뒤바꿔 놓은 세상

"교환원 언니, 천국과 연결해 주세요/ 엄마가 거기 있다는데/ 천사들과 함께 황금 계단에 앉아 있데요/ 내가 전화했다는 걸 알면 퍽 기뻐하실 걸요/ 전화를 걸어줘요, 그래 줄 수 있지요?/ 엄마에게 꼭 말해주고 싶어요/ 이곳에서 우린 너무 외롭다고." 노래 제목은 '헬로 센트럴, 천국과 연결해줘요(Hello Central, Give Me Heaven)'다. 나온 지 백 년도 훨씬 넘는 그야말로 '올디' 중의 '올디'다. 그런데도 매년 이맘때쯤이면 가끔 전파를 탄다. 노랫말은 물론 멜로디조차 애잔해 듣다 보면 가슴 한 켠이 찡해 온다. '헬로 센트럴'은 전화교환원을 일컫는다. 예전엔 교환수가 대부분 여성들이어서 '헬로 걸'이라고 불렀다. 센트럴은 중앙전화국쯤이 되겠다. 천국까지는 너무 먼 탓에 센트럴을 찾았던 것 같다. 노래의 실제 주인공은 여섯 살짜리 소녀. 세상을 떠난 엄마가 보고 싶고 또 아빠가 늘 풀이 죽어있어 천국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던 것. 신문에 이 소녀의 딱한 사연이 실리자 당시 유명 싱어송라이터가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 어린 소녀 수준으로 노랫말을 지었으니 그 감동이 오죽했으랴. 마침 생스기빙데이가 가까워 '헬로 센트럴'은 여성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이 노래가 담긴 레코드가 백만 장 넘게 팔렸다니 그 인기를 가늠할 만할 터. 그때만 해도 생소하게 들렸던 '헬로'가 노래가 히트하자 대박을 쳤다. 일상의 단어로 자리를 잡은 것. 전화가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헬로'는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전파됐다. 전화기는 누구나 아는 대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작품이다. "왓슨, 내 말 들리나." 자신의 조수 토머스 왓슨과 뉴욕-샌프란시스코 대륙횡단 전화통화를 하며 흥분해서 건넨 말이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명언이다. 전화를 만든 벨은 인사말이 필요했다. 논의 끝에 내놓은 게 '어호이(ahoy)'. 뱃사람들끼리 주고받던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호이'가 어떻게 '헬로'로 바뀌었을까. 이때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등장한다. 그는 전화가 기업의 생태계를 뒤바꿔 놓을 것으로 내다봤다. '어호이'가 맘에 들 리 없었다. '헬로'가 탄생한 배경이다. '언어의 연금술사' 마크 트웨인마저 '헬로'에 감탄을 금치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긍정과 혁신을 담아냈다"며 찬사를 쏟아낸 것. 단어 자체가 한편의 연설 만큼이나 깊이와 무게가 느껴진다는 헬로 찬미론까지 나왔다. 벨과 에디슨. 둘은 나이도 동갑이어서 경쟁 또한 치열했다. '가방끈'은 그러나 벨이 훨씬 길었다. 대학교수까지 지냈으니 '독학' 에디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에디슨은 그러나 언어 창조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헬로'는 이후 쓰임새가 넓어졌다. 굿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등 복잡한 인사말도 '헬로' 하나면 충분하지 않는가. "헬로, 저에요/ 시간이 모든 걸 치유해 준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하네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헬로/ 당신에게 이 말을 하려고 천 번 넘게 전화했어요/ 당신께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아델의 메가 히트송 역시 '헬로'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헬로'는 발매와 동시에 세계 팝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했다. 다음 주는 미국의 최대 명절인 생스기빙데이다. 아델의 노래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면 사과를, 멀리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겐 전화로나마 '헬로'를 전해보자. 따뜻한 마음씨가 전해져 서로 심쿵하지 않을까. 천국에 있는 분들에게도 '헬로'를 잊지 말자.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1-15

[윌셔 플레이스] '방울뱀'의 정치학

지난 2010년 월드컵(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주목을 끌었던 나라는 단연 '축구 후진국' 미국이다. 설마, 설마 하다가 8강에까지 올랐으니 세상에 그런 이변이…. 미국이 선전한 비결은 무엇일까. 월드컵을 앞두고는 각국 대표팀마다 응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붓는다. 대회가 코앞인데 없던 기술이 갑자기 생겨날 리도 없고. 선수들의 정신력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유니폼 안쪽 선수들의 심장이 맞닿는 곳에 문구를 새겨 넣었다. '디톰(DTOM)' 딱 네 글자다. '나를 짓밟지 마라(Don't Tread On Me)'의 첫 글자를 따 만들었다. '디톰'을 가슴 깊이 아로 새긴 미국 대표팀은 결국 일을 냈다. '전차군단' 독일을 격파한 아프리카 최강 가나를 상대로 2대1 역전승을 거뒀다. 월척을 낚은 미국에 세계가 놀랄 만했겠다. 그런데 '디톰'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멀리 독립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인공은 크리스토퍼 개드스덴(1724~1805). 조지 워싱턴의 각별한 신임을 얻은 그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훗날 '건국의 아버지' 반열에 오른다. 그가 바로 '개드스덴 플래그(Gadsden Flag)'를 만든 장본인이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개드스덴 플래그'가 미국의 진정한 국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노란색 바탕의 깃발 정가운데는 방울뱀이 그려져 있다. 잔뜩 꽈리를 틀고 있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기세다. 방울뱀 밑에 '나를 짓밟지 마라'는 슬로건이 쓰여있다. 영국이건 누구건 미국의 독립에 걸림돌이 된다면 가차없이 독을 뿜어 제압하겠다는 다부진 결의를 담아냈다. 당시 영국군이 보기에 식민지 민병대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불과했을 터. 그러나 방울뱀의 독기로 똘똘 뭉친 독립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 역사가 선수들의 심장을 두들겨 월드컵에서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 역시 원정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오르는 쾌거를 일궈냈다. 태극전사들의 유니폼에 새겨진 키워드는 '투혼'. 어쩌면 '디톰'과도 맥이 통하는 슬로건이 아닌가 싶다. '디톰'은 지난 2011년 미국 특수부대가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을 때도 화제가 됐다. 새벽녘인데도 수많은 뉴욕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성조기와 함께 '개드스덴 플래그'를 흔들어 댄 것. 한낱 테러리스트 주제에 감히 '방울뱀'을 건드려? '투혼'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한국 대표팀이 팬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A매치(국가 대표팀 간 친선경기)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내년 러시아 월드컵은 참가하나 마나 자조섞인 소리도 들려온다. 대한민국 정부도 다를 바 없겠다. 중국 비위 맞추랴, 북한 껴안으랴, 미국 눈치 보랴. 아마도 싸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을 하자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지 않는가. 지도층에게서 그런 결기가 느껴지지 않아 불안해지는 것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해서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한국 패싱'은 없다고 했지만 그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아메리카 퍼스트' 곧 자국 이익이 먼저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가 시진핑과 귓속말로 무슨 얘기를 할지. 사실 알고 보면 한국 땅에도 방울뱀 못지 않는 독사가 있다. 살모사 말이다. '나를 짓밟지 마라.' 살모사의 살기를 보여줘야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텐데.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1-08

[윌셔 플레이스] '시밀로' 전업주부의 날

죽은 지 10년도 훨씬 넘는 가수가 한국의 대기업을 살려냈다면 누가 믿을까. 그런데 현실이 그랬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8'이 미국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아서다. 주인공은 페기 리(1920~2002). 노래도 뛰어나지, 몸매도 받쳐주지. 아마 여자가수로는 최초로 '섹시'란 수식어가 붙었지 않나 싶다. 광고의 배경음악이 바로 그가 불러 히트한 '시밀로(Similau)'다. 유튜브를 검색해 들어보면 금세 "아, 그 노래"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한인들도 그런데 하물며 미국인들이야. 음악에 빠져들고, 영상에 한 번 더 반하고. 수백만의 폭풍클릭이 이어졌다. 광고가 대박을 치는 바람에 갤럭시 노트8의 인기도 덩달아 치솟고. 전작인 갤노트7 배터리 폭발사고의 악몽을 말끔히 지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밀로'는 영어가 아닌 스패니시 사투리.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갤럭시 노트8의 슬로건 역시 '아이 러브 유'다. 스마트폰의 기능을 로맨틱한 분위기의 영상으로 담아냈다. 삼성의 성공은 첨단기술이 큰몫을 해냈겠으나 페기의 공도 적지 않았겠다. '시밀로'가 삼성의 스마트폰을 미국시장 점유율 1위로 끌어올렸다면 페기의 또다른 히트송 '나는 여인(I'm a Woman)'은 엄마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사를 간추리면 이렇다. "난 매일 양말 마흔 네 켤레를 빨아 줄에 내다 걸지/ 1에서 9까지 한 번 세워봐/ 스물네 장의 셔츠를 풀 먹여 다림질까지 끝내지." 2절은 주부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노동인지를 말해준다. 스트레스는 또 어떻고. "집이 워낙 낡았잖아/ 닦고 문지르고…다임(10센트)처럼 반짝반짝 광을 내지/ 그러고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 얼굴에 대충 분칠을 해대고는 옷을 빼입지/ (클럽에서) 아침 4시까지 흔들어 대고는 돌아와 잠을 자/ 눈 뜨는 시간은 6시/ 그래도 괜찮아, 난 여자니까" 전업주부의 삶을 풀어냈다고 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노래는 지난 2012년 대선 때 화제가 됐었다. 재선에 나선 오바마의 상대는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오바마 캠프의 한 선거전략가가 롬니의 부인 앤을 겨냥했다. "평생 단 하루도 일을 안 해본 사람이…" 남편 잘 만나 베짱이처럼 놀고 먹었다며 인신공격을 퍼부어댔다. 참다 못한 앤이 입을 열었다. "아이 다섯, 그것도 모두 사내아이들을 키운다는 걸 상상해 봐라. 차라리 나가서 돈을 버는 게 더 쉬웠을 거다. 몇 번이나 뛰어나가려 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전업주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서." 앤의 솔직한 고백에 주부들의 표심이 흔들렸다. 위기를 감지한 오바마가 직접 진화작업에 나섰다. "세상에 엄마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내 엄마도 싱글맘으로 나와 동생을 키웠다. (사랑의) 수고를 한 앤에 존경을 표한다." 라디오 방송마다 페기의 노래를 틀어 분위기를 잡은 것은 물론이었다. 기혼여성이 두 번째 아기를 낳으면 넷 중 하나꼴로 전업주부가 된다는 통계도 나와있다. 여권신장 못지 않게 가정 지킴이도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정확히 알 수는 없겠으나 소셜시큐리티 은퇴연금에 배우자 베니핏이 있는 걸 보면 짐작이 간다. 앤처럼 일을 안 해도 남편 몫의 절반을 받지 않는가. 양육과 가사가 얼마나 힘든 지를 인정한 것일 터. 매년 11월 3일은 '전업주부의 날(Housewife Day)'이다. 이날 반나절만이라도 아내에게 휴식을 주면 어떨지. '시밀로'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1-01

[윌셔 플레이스] 베스트바이 직원에 '담뱃값' 집어준 삼성

일본서 미제, 소위 '메이드 인 USA' 제품을 만들어 수출했다면 누가 믿을까. 황당하다 못해 사기극이 아닌지 의심을 할 만하겠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근거없는 소문은 결코 아니었다. 1950년대의 일본.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산업시설이 남아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수출품이랍시고 만들었다. 값은 쌌으나 물건이 조잡하기 짝이 없었을 터. 미국이 사줘야 입에 풀칠을 할텐데. 하지만 허접스레기 같은 '메이드 인 저팬'을 소비자들이 거들떠 보기나 했겠는가. 루머가 나돈 건 그 무렵. 이곳에서 만들면 미국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얘기가 번졌다. 이곳은 어디? 우사(Usa)다. 지도를 보면 일본 최고의 온천 리조트인 벳푸에 아주 가깝다. 우사를 전부 영어 대문자로 쓰면 'USA.' 그러니 이곳서 만든 제품은 'Made in USA'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원산지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명기하는 것이 원칙. 아무리 '우사'를 강조하고 싶어도 '메이드 인 저팬'이라고 해야 옳다. 오죽 사정이 심각했으면 이런 상상을 했을까 싶다. 소니도 미국시장을 뚫기 위해 회사이름을 영어로 바꿨을 정도다. 청소년들을 일컫는 슬랭 '소니(sonny)'를 차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는 일본뿐 아니라 온세계가 미국만 쳐다보며 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싸구려의 대명사격이었던 '메이드 인 저팬'은 20년 뒤 지구촌을 휩쓸다시피 한다. 퀄리티로 승부를 걸어 일제 하면 품질을 먼저 떠올리는 세상이 된 것. 2000년대 들어 '메이드 인 저팬'은 '메이드 인 USA'로 갈아탄다. '우사'의 오랜 꿈이 반세기만에 결실을 봤다고 해야할지. 도요타, 혼다, 니산이 줄줄이 미국에 공장을 세우고 현지생산을 했다. 미국산 부품에, 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자동차를 만들어 전체 생산 공정의 70% 이상이 '미제'다. 도요타 캠리가 일제가 아닌 '메이드 인 USA'로 탈바꿈한 것이다. 고급차종인 렉서스도 대부분 미주(캐나다)에서 생산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대로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가 없어지면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옮겨와야 할 처지다. '메이드 인 코리아'도 일본과 비슷한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른 건 두 말할 나위없다. 미국서 팔리는 현대 기아차도 도요타 처럼 현지제작이어서 정확히 말해 미제다. 특히 미국은 노동생산성이 세계 1위여서 굳이 차를 한국서 만들어 들여올 이유가 없다. 울산에서 차 한 대 만들 시간에 앨라배마 공장에선 두 대가 굴러나온다는데. 최근 LG와 삼성전자 세탁기가 이른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대상에 올라 파장이 일고 있다. 경쟁사인 월풀 등 미국업체가 "두 한국 기업의 무차별 공격으로 우리(미국) 산업이 다 죽게 생겼다"며 정부에 고발한 탓이다. 하지만 두 회사의 세탁기는 내년부터 사실상 미제가 된다. 삼성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LG는 테네시에 각각 공장을 세워 여기서 제품을 생산한다. 그래서인지 공청회에 나온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삼성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가. 수천개 일자리가 생겨 삼성이 이뻐 죽겠다는 거다. 미국정부가 월풀의 요구대로 관세를 부과하면 소비자들로부터 혁신제품을 접할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된다. 더구나 삼성과 LG도 조만간 미제가 될텐데 규제가 웬말. "우리 물건을 제발 매장에 진열만이라도 해달라"며 베스트바이 등 소매업체 세일즈맨에게 담뱃값을 쥐어줬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일본의 '우사'를 뛰어넘는 약진을 거듭한 한국의 대기업들에 박수를 보낸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0-25

[윌셔 플레이스] 모세가 실패한 지도자인 이유

신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했다는 '약속의 땅(Promised Land)'. 가나안이 바로 그 곳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는 그러나 결코 순탄치 않았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대업을 눈 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지 않은가. '약속의 땅'은 두 영웅이 역사에서 사라진 뒤 의외로 쉽게 이스라엘 수중에 떨어진다. 두 지파, 곧 유다와 시므온이 힘을 합친 결과다. 연합군이 격파한 적은 무려 1만여 명. 구약의 판관기(사사기)에 그렇게 쓰여져 있다. 과장이 좀 됐겠으나 어쨌든 당시 인구로 봐선 엄청난 숫자다. 최대의 전과는 폭군으로 악명을 떨쳤던 아도니베젝의 생포다. 성경엔 그의 탄식이 전해져 내려온다. "내가 엄지 손가락과 엄지 발가락을 자르고, 내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한 왕이 70여 명이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악의 축'이라 부를 만하지 않을까. 군사 전문가들은 유다와 시므온의 연합을 인류 최초의 동맹으로 간주한다. 그 때가 기원 전 12세기 무렵. 이후 동맹은 모든 전쟁의 키워드가 되다시피 했다. 제1,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요즘의 동맹은 집단안보의 성격을 띤다. 유럽이 지난 70년 동안 전쟁의 공포없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덕분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폴란드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지정학적 위치는 우리보다 훨씬 열악하다. 한반도와 일본 사이엔 현해탄이라도 있지만 폴란드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끼어 있어 늘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겼다. 그런데 나토에 가입하고 나서부터는 두 발을 편히 뻗고 잘 수 있게 된 것. 회원국이 공격을 당하면 나토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로 여긴다고 했으니 누가 감히 폴란드를 욕심내겠는가. 나토 최고사령관은 지금도, 앞으로도 항상 미국 몫이다. 유럽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이 쥐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지 싶다. 그렇다고 나토 회원국 29개 나라가 모두 친미 성향만은 아니다. 그리스와 터키는 대놓고 반미를 외친다. 그래도 나토를 깬다는 말이 안 나온다. 왜? 미국의 우산 아래 있는 게 아무래도 제일 안전하니까. "동맹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최근 청와대 특보 한 분이 한 얘기다. 물론 전쟁이 나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라지만 동맹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북의 불바다, 핵 협박에도 무덤덤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은 아닐지. 동맹이 든든히 뒤를 받쳐주고 있어서다. 눈을 한 번 아시아로 돌려보자. 중국의 주변국들 역시 대부분 미국과 동맹 내지는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과 일본, 필리핀은 상호방위조약으로 묶여있고, 호주는 영국과 함께 '아메리카의 푸들'로 불릴 정도다. 워싱턴의 '애완견'이라는 비아냥이다. 인도와 베트남은 또 어떻고. 중국과 드러내놓고 적대관계다. '군사궐기'를 내세워 미국과 패권을 다툴 요량이지만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중국은 거의 포위된 상태다. 동맹은 작은 나라들에겐 생존을 보장해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은들 안보에 틈이 생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음달 7일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이번엔 국회 연설도 예정돼 있어 그만큼 한국의 위상을 인정해주는 것일 터.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트럼프의 방문이 동맹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0-18

[윌셔 플레이스] '서울 브라만'의 머그샷

괘씸죄는 미국에도 있다. 특히 사리를 분별할 만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벌금폭탄을 맞거나 심지어 수갑이 채워져 경찰차 뒤켠에 실린다. 15년 전 쯤인가. 동료 기자가 괘씸죄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취재를 나갔다가 마감시간에 쫓기다 보면 늘 속도위반에 신경이 쓰이기 마련. 그래서 DMV(차량국)에 취재용 자동차 번호판을 신청했다. 이 플레이트는 왼쪽 상단에 작은 글씨로 'P'자가 새겨져 있다. Press의 첫 글자로 언론사를 뜻한다. 경찰이 금방 알아볼 수 있어 단속을 피해보려는 얄팍한 속셈이 작동한 것. 솔직히 신분과시 욕구도 한몫 했으리라. 일반인이야 P가 뭔지 알 까닭이 없을 터. 끗발있는 기관의 차량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얼마 안가 걸리고 말았다. 경찰의 면허증 제시 요구에 슬쩍 LA경찰국이 발급한 프레스카드(기자증)를 보여줬다. 그 순간 경찰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신 신분은 번호판을 보고 이미 알았다. 그러니 기자증 말고 라이선스를 내놓으라"고 짜증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과속. 그것도 제한속도보다 무려 20마일이나 넘게. 경찰관이 딱지를 떼어주며 한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법과 질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규칙을 어겨서야 되겠느냐." 창피한 나머지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20마일 가운데 절반 정도는 깎아줬을텐데 괘씸죄가 적용돼 에누리 없이 20마일 과속 티켓을 받았다. 당장 P번호판을 떼어낸 것은 물론. 그 바람에 DMV에 과태료까지 내야했다. 번호판이 문득 생각난 건 최근 괌에서 체포된 한국 법조인 부부의 '머그샷(경찰의 피의자 사진)' 때문이다. 두 아이를 차에 방치한 채 쇼핑을 한 혐의다. 남편은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 소속 변호사, 아내는 현직 판사다. 인터넷에선 부부가 최소 45분 가량 아이들을 무더위에 홀로 나뒀는데도 경찰에 3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며 난리가 났다. 대한민국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사건은 그러나 경찰과 남편이 나눈 대화에 방점이 찍힌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이들이 다칠 뻔했다." 괌 현지 언론보도에 따르면 남편은 경찰의 말을 '웃어넘겼다'고 했다. "난 변호사고, 아내는 판사다." 그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다." 경찰관의 반응은 기사에 나오지 않아 모르겠다. 추측하건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so what)." 얼마나 현지인 경관을 얕잡아 봤기에. 상대가 백인이어도 이런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네티즌들에 따르면 판사 아내와 변호사 남편은 연예인 못지않은 얼짱이다. 더구나 둘 다 서울대 출신이어서 그 자부심이 한국판 '보스턴 브라민(Boston Brahmin)'이라 부를 만하겠다. 브라민(또는 브라만)은 인도 카스트에서 최상위 계급. 보스턴을 포함한 뉴잉글랜드 태생으로 하버드를 나온 수퍼 엘리트를 이렇게 부른다. 부부에 '서울 브라민'이란 별명을 붙여줘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부부가 머그샷까지 찍은 걸 보면 괘씸죄에 걸린 게 틀림없다. 아이 둘을 위험에 빠트리고도 "우린 변호사, 판사"를 해대 경찰이 작심을 하고 수갑을 채웠을 거다. 남의 나라에 와서도 우쭐댔는데 한국에서는 오죽했으랴 싶다. 인간의 기초적인 상식조차 결여된 사람이 남의 유무죄를 판단하다니. 적폐청산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개념없는 '서울 브라민'이 으시대는 한 선진국이 되기는 글렀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0-11

[윌셔 플레이스] 총기가 '문화'로 미화되는 나라

가장 기억에 남는 관광상품 제 1호. 미국서만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사격장이다. 10년도 훨씬 넘었는데도 여태껏 그 추억을 떠올리며 고마워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실탄 사격이라니. 그것도 M16, 우지 기관총 등 온갖 총기류를. 운때가 맞으면 건쇼, 곧 총기전시회도 구경할 수 있다. 페어그라운드에 총포상들이 텐트를 치고 각종 무기류를 진열해 놔 눈요기도 제격이다. 개중에는 제임스 본드의 007 영화에서나 봤을 소형 첨단무기도 눈에 띈다. 한국서 온 손님은 눈이 휘둥그래질 수밖에. 그랜드캐년보다 건쇼 구경이 더 인상적이었다는 게 괜한 말은 아닐지 싶다. 언젠가 건쇼에서 귀동냥해 들은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호플로포비아(hoplophobia)' 이른바 '총기 공포증'이다. 총기규제론자들을 비아냥대는 슬랭이라고 한다. 총을 다루지 못하면 겁쟁이로 매도된다고 할까. 누구나 총을 가질 수 있는 나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나오지만 이에 대한 답은 늘 상투적이다.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숫자에 비하면…." 총이 자동차 보다 덜 위협적이라니. 또 하나 있다. 총이 문화로 간주되는 곳이 미국이다. 이름하여 '건 컬처'란 것이다. 어떻게 살상무기를 소지하는 행위가 문화란 말인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총기문화'가 있는 나라다. 미국서 총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함의한다. 이 대목 만큼은 역사학자들도 일부 인정하는 바다. 대영제국의 정규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 주민들이 총기로 무장하지 않았더라면 꿈도 못꿨을 인류 최대의 사건이다. 자유를 얻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의 집권기간은 기껏 4년에서 8년이다. 권력은 속성 상 한번 맛들이면 내려놓기 어렵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한 켠에는 영구집권의 야망이 꿈틀댔을 터. 그런데도 미국엔 독재자가 없다. 왜? 전 국민이 무장하고 있는데 감히. 누구나 알고 있는대로 총기소유는 수정헌법 제2조에 나와 있다. 국민의 기본권이어서 뜯어고치기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미국엔 '수정헌법 제2조의 날(the 2nd Amendment Day)'이란 게 있다. 그런데 주마다 기념일이 다르다. 대개는 12월 15일이다. 오클라호마 같은 곳은 그러나 6월 28일로 잡혀 있다. 전자는 제2조가 비준된 날이고 후자는 2010년 연방대법원이 총기규제와 관련해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린 날이다. 미국서 정치인들이 가장 금기시 하는 어젠다가 총기규제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정치생명이 한순간에 훅 날아갈 수 있어서다. 언젠가 세계 최대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가 입방아에 올랐다. 총기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고객들에게 스타벅스 매장에 총기를 가져오지 말라는 공개 편지를 써 논란에 휩싸인 것. "라테나 잘 만들어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슐츠는 자신의 기업가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총기규제를 입에 담았다가 역풍을 맞았다. 엊그제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라스베이거스가 삽시간에 '킬링필드'가 되다시피 했다. 전에는 '건 컬처'가 오늘의 미국을 지구촌 최강국으로 만든 요인이라고 믿었는데 TV영상을 보곤 생각이 싹 바뀌었다. 총은 결코 문화가 아닌 저주의 대상이란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총이 자유를 지켜준다는 말도 더는 믿지 못하겠다. 앞으론 호텔도 공항처럼 검색이 삼엄해질 테니까. 총이 자유는커녕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수단이 될 게 뻔하지 않는가. 그냥 총만 보면 겁부터 나는 '호플로포비아'로 살아가련다. 박용필 / 논설고문

201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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